사와무라 에이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와무라 에이지는 일본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로, 1917년에 태어나 1944년 태평양 전쟁 중 전사했다.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주목받았고, 1934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과의 경기에서 9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활약을 펼치며 큰 인상을 남겼다. 1936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가 시작되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37년에는 MVP를 수상하며 5관왕을 달성하기도 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940년에는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44년 전사 후, 그의 등번호 14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와무라 에이지상이 제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훈7등 청색동엽장 수훈자 - 사이토 하지메
사이토 하지메는 신센구미의 핵심 인물이자 뛰어난 검객으로, 신센구미 부장 조근으로서 활약하고 보신 전쟁 이후에는 후지타 고로로 개명하여 경찰로 활동하는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았으며, 그의 삶과 업적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매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 이세시 출신 - 이치카와 곤
이치카와 곤은 일본의 영화감독으로, 애니메이터로 시작하여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특히 《버마의 하프》, 《들불》, 《도쿄 올림픽》, 《이누가미 일족》 등의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아내 와다 나토와의 협업과 "이치카와 터치"로 불리는 독특한 영상 스타일을 확립했다. - 이세시 출신 - 노구치 미즈키
노구치 미즈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며, 2002년 나고야 여자 마라톤 우승을 시작으로 2007년 도쿄 국제 여자 마라톤 우승까지 기록하며 활약했고, 2016년 은퇴 후 해설가로 활동했다. - 일본 프로 야구 영구 결번 - 요시다 요시오
요시다 요시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뛰어난 수비와 공격 능력을 인정받아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고, 은퇴 후에는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맡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 일본 프로 야구 영구 결번 - 호시노 센이치
호시노 센이치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주니치 드래건스 에이스 투수, 주니치·한신·라쿠텐 감독을 역임하며 각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특히 라쿠텐에서는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과 함께 투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 스타일로 사랑받았다.
사와무라 에이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 | |
포지션 | 투수 |
출생일 | 1917년 2월 1일 |
출생지 | 미에현우지야마다 시 |
사망일 | 1944년 12월 2일 |
사망 장소 | 태평양, 야쿠시마 해상, SS 하와이 마루 |
타석 | 좌 |
투구 | 우 |
프로 경력 | |
데뷔 리그 | 일본 야구 리그 |
데뷔 일자 | 1936년 7월 1일 |
데뷔 팀 | 도쿄 교진 |
최종 일자 | 1943년 10월 24일 |
최종 팀 | 도쿄 교진 |
소속 팀 | 도쿄 교진 (1936–1937, 1940–1941, 1943) |
통계 (NPB) | |
승-패 | 63-22 |
평균 자책점 | 1.74 |
탈삼진 | 554 |
수상 및 업적 | |
리그 우승 | 4회 (1936 추계, 1940, 1941, 1943) |
일본 야구 리그 챔피언 | 4회 (1936 추계), (1940), (1941), (1943) |
일본 트리플 크라운 | 1937 춘계 |
일본 야구 리그 MVP | 1937 춘계 |
노히트 경기 | 3회 |
영구 결번 | 요미우리 자이언츠 #14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유형 | 일본 |
헌액 년도 | 1959 |
기타 정보 | |
본명 | 사와무라 에이지 |
신장 | 174 |
체중 | 71 |
최종 학력 | 교토 상업 학교 (중퇴) |
로마자 표기 | Eiji Sawamura |
2. 프로 입단 전
사와무라 에이지는 교토 상업학교 투수로 활약하며 1933년 춘계, 1934년 춘계, 하계 고교 야구 전국 대회(당시 중학 야구)에 출전했다.
1934년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미일 야구 전일본팀(全日本チーム일본어)에 빅토르 스타루힌과 함께 중등 야구계에서 선발되었다.[10] 구사나기 구장에서 열린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군과의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호투를 보였다.[14]
1934년 11월 20일, 17세의 사와무라는 베이브 루스, 지미 폭스, 루 게릭, 찰리 게링거를 포함한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수들로 구성된 방문팀과 맞붙었다. 4회에 등판한 사와무라는 9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5 이닝 동안 미국팀에게 1 득점만을 허용했다. 7회 게릭의 홈런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게링거, 루스, 게릭, 폭스를 차례로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미국팀 감독이었던 코니 맥은 사와무라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아 메이저 리그 계약을 제의했지만, 사와무라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5]
일본 프로 야구 여명기에 전설적인 활약을 보인 '''불멸의 대투수'''였다. 1934년 미일 야구에서는 타고난 강속구로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등 메이저 리그 선발을 압도했으며, "스쿨보이 사와무라"로서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그 이름을 떨쳤다.[16]
미일 야구 대회에서 사와무라는 5경기에 등판 (4선발)했다. 11월 10일 진구 구장에서 열린 제 5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했지만 12안타를 맞고 0-10으로 패했다.[13] 11월 20일 구사나기 구장에서 개최된 제 9전에서 다시 선발로 등판하여, 6회까지 2안타 7삼진 무실점으로 막았다. 7회말에 루 게릭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0대1로 패했지만,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상대로 8회까지 9삼진을 잡아내고, 5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다. 경기 후, 미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코니 맥은 "사와무라를 미국으로 데려와라. 18살의 그를 2, 3년 제대로 팜에서 키우면 분명 메이저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14]
11월 28일 교토시립 구장에서 열린 제 16전에서는 사와무라의 투구 버릇 (커브를 던질 때 입을 찡그리는)이 연구된 탓에 8실점하고 강판되었으며[19], 12월 1일 최종 제 18전에서도 4회 9실점으로 부진했다.[20] 결국, 사와무라는 구사나기 구장의 제 9전을 제외한 4경기에서 0승 3패, 평균자책점 10.65 (20⅔이닝 33실점 24자책점)로 부진했고, 통산 0승 4패, 평균자책점 7.85 (28⅔이닝 34실점 25자책점)로 대회를 마감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의 일본 선발 대 메이저 리그 선발의 경기가 일본의 0승 16패로 끝났기 때문에, 구사나기 구장에서의 사와무라의 호투는 현재에도 일본에서 회자되고 있다.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1917년 미에현 우지야마다 시(현 이세시)에서 사와무라 겐지와 미치에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아버지 겐지도 야구를 좋아했고, 사와무라도 메이린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야구를 시작했다.4학년 때 초등학교 야구팀 투수가 되었는데, 또래에 비해 상당히 빠른 공을 던져 지역에서 유명해졌다.[5] 5학년 때 팀의 에이스가 되자 메이린 초등학교는 미에현 대회에서 우승했다. 교토 오카자키 공원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는 3회전에서 와카야마 초등학교에 패했지만, 사와무라는 1경기 평균 15개의 삼진을 잡아내 주목받았다.[6]
교토 상업학교 투수로 활약하며 1933년 춘계, 1934년 춘계, 하계 고교 야구 전국 대회(당시 중학 야구)에 출전했다.
1934년 11월 20일, 17세의 사와무라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베이브 루스, 지미 폭스, 루 게릭, 찰리 게링거 등이 포함된 올스타팀과 맞붙었다. 4회에 등판하여 9명의 타자를 삼진 처리했고, 5 이닝 동안 1 득점만 허용했다. 7회 게릭의 홈런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게링거, 루스, 게릭, 폭스를 연속 삼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팀 감독 코니 맥은 사와무라에게 메이저 리그 계약을 제안했지만, 사와무라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2. 2. 1934년 미일 야구 대회
1934년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미일 야구의 전일본팀(全日本チーム일본어)에 출전하였다. 시즈오카 현 구사나기 구장에서 열린 미국 메이저 리그 선발군과의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호투를 보였다.[14] (그러나 시리즈는 일본의 9전 전패로 끝났다).1934년 11월 20일, 17세의 사와무라는 베이브 루스, 지미 폭스, 루 게릭, 찰리 게링거를 포함한 메이저 리그 올스타 선수들로 구성된 방문팀과 맞붙었다. 4회에 등판한 사와무라는 9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5 이닝 동안 미국팀에게 1 득점만을 허용했다. 7회 게릭의 홈런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게링거, 루스, 게릭, 폭스를 차례로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미국팀 감독이었던 코니 맥은 사와무라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아 메이저 리그 계약을 제의했지만, 사와무라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15]
일본 프로 야구 여명기에 전설적인 활약을 보인 '''불멸의 대투수'''였다. 1934년 미일 야구에서는 타고난 강속구로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등 메이저 리그 선발을 압도했으며, "스쿨보이 사와무라"로서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그 이름을 떨쳤다.[16]
1934년 11월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로 미일 야구가 개최되면서, 메이저 리그 선발과 대결하기 위한 일본 선발 팀 (정식 명칭은 전일본 대표 야구팀)이 편성되었다. 와세다 대학 OB인 미하라 오사무・나카지마 하루야스, 호세이 대학 OB인 카리타 히사노리 등 대학 야구에서 활약했던 멤버들이 대거 참가하는 가운데, 사와무라는 빅토르 스타루힌과 함께 중등 야구계에서 멤버로 선발되었다.[10]
대회에서는 5경기에 등판 (4선발)했다. 11월 10일 진구 구장에서 열린 제 5전에서는 선발로 등판했지만 12안타를 맞고 0-10으로 패했다.[13] 11월 20일 구사나기 구장에서 개최된 제 9전에서 다시 선발로 등판하여, 6회까지 2안타 7삼진 무실점으로 막았다. 7회말에 루 게릭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하여 0대1로 패했지만, 메이저 리그 선발팀을 상대로 8회까지 9삼진을 잡아내고, 5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다. 경기 후, 미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코니 맥은 "사와무라를 미국으로 데려와라. 18살의 그를 2, 3년 제대로 팜에서 키우면 분명 메이저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14]
11월 28일 교토시립 구장에서 열린 제 16전에서는 사와무라의 투구 버릇 (커브를 던질 때 입을 찡그리는)이 연구된 탓에 8실점하고 강판되었으며[19], 12월 1일 최종 제 18전에서도 4회 9실점으로 부진했다.[20] 결국, 사와무라는 구사나기 구장의 제 9전을 제외한 4경기에서 0승 3패, 평균자책점 10.65 (20⅔이닝 33실점 24자책점)로 부진했고, 통산 0승 4패, 평균자책점 7.85 (28⅔이닝 34실점 25자책점)로 대회를 마감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의 일본 선발 대 메이저 리그 선발의 경기가 일본의 0승 16패로 끝났기 때문에, 구사나기 구장에서의 사와무라의 호투는 현재에도 일본에서 회자되고 있다.
3. 프로 선수 시절
1934년 시범 경기의 전국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1936년 일본 야구 연맹이 창설되자, 사와무라는 도쿄를 연고로 요미우리 신문[1]이 소유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팀의 에이스 투수가 되었다. 1936년 9월 25일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노히터를 기록했고, 이후 1937년 5월 1일과 1940년 7월 6일에 두 번 더 노히터를 달성했다. 1937년에는 33승 10패, 평균 자책점 1.38을 기록하며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1937년부터 1943년까지 통산 105경기에 등판, 63승 22패, 554 탈삼진, 평균 자책점 1.74를 기록했다.
3. 1. 대일본도쿄야구클럽과 도쿄 교진군 (1934년 ~ 1937년)
1934년 연말, 전일본팀을 기초로 한 프로 야구 팀인 ‘대일본도쿄야구클럽’(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일본어, 후에 팀을 도쿄 교진군으로 개명하였고 1947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현재의 팀 이름으로 변경)의 결성(정식 설립은 12월 26일)에 참가했다.[90] 학교를 중퇴하고 프로 구단에 들어간 것은 야구부 내에서 다른 학생에 의한 하급생 폭행 사건이 표면화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연대 책임으로 고시엔 대회 출전을 포기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사와무라 영입을 시도했으나[90] 스즈키 소타로 매니저의 반대로 무산됐다.프로 야구 리그가 시작된 1936년 가을, 사와무라는 처음으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 오사카 타이거스와의 우승 결정전에 3경기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팀에 처음으로 우승을 안게 되었다. 1937년 춘계 대회에서는 24승(20선발승)을 올려 프로 야구 MVP에 선정되는 등 짧은 기간에 신기록을 수립했다.[2] 당시 대학 야구 전성기에 일본 프로 야구 리그가 궤도에 오른 것은 그의 공적이 크다고 말해진다. 세 차례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초창기의 자이언츠,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5년 2월부터 7월에 걸쳐 다이닛폰 도쿄 야구 구락부(미국 도착 시 도쿄 자이언츠로 개명)의 제1차 미국 원정에 참가했다. 당초 70경기 정도를 예정했지만, 미국에서의 사와무라의 인기로 인해 계획은 109경기로 확대되었다[24]。 당시 AA(현재 AAA) 퍼시픽 코스트 리그 8개 구단 외에도 미국, 캐나다, 멕시코, 하와이를 돌며 논프로, 대학, 재류 일본인의 팀과 대전했다. 자이언츠는 코스트 리그 8개 구단과의 7승 중 5승을 사와무라의 역투로 거두었다[25]。 그 외에 원정 전체에서 사와무라는 21승 8패 1무, 313탈삼진의 전적을 남겼다. 이 원정에서는 당시 아직 마이너(샌프란시스코 실스)에 있던 조 디마지오와도 대전했지만, 삼진을 잡기는커녕 엄청난 홈런을 맞았다고 한다[26]。 원정 중에 대전한 포틀랜드 비버스의 비즈니스 매니저인 로이 맥(코니 맥의 차남)으로부터, 사와무라 본인이 원한다면 팀에서 맡아 꼭 미국에서 성공시키고 싶다는 희망이 전달되었다[27]。 또한, 원정 도중의 밀워키에서는, 한 미국인이 서류를 내밀어서 사인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한 사와무라는 가볍게 사인했지만, 사실 그 미국인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스카우트였고, 서류는 계약서였다는 일화도 있다[28]。
같은 해 9월부터 11월에 걸쳐 자이언츠의 국내 순회에도 참가했다. 이 기간 동안, 고쿠라에서 다롄 실업과 대전했을 때 다롄의 에이스 타니구치 고로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이 지도는 사와무라의 투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사와무라 또한 타니구치를 은사 중 한 명으로 꼽았다[29]。 11월 3일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이 이끄는 전 오미야 전에서는, 5회 말 3안타 2사사구로 난조를 보여 2점을 잃는 등, 1-4로 순회에서 유일한 패배를 기록했다[30]。 순회 통산으로는 22승 1패, 158이닝 동안 187개의 삼진을 잡았다. 타격에서도 타율 .301을 기록했다[31]。
1936년 2월부터 5월에 걸쳐 제2차 미국 원정에서는 이전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아 11승 11패, 방어율 4.97로 끝났다[32]。
같은 해 하계 리그부터 자이언츠가 참가했지만, 팀은 2승 5패로 고전했고, 사와무라도 1승 1패의 평범한 성적으로 끝났다. 미국 원정에서 투수가 소중히 여겨지는 것을 보아온 사와무라를 비롯한 투수진은 감독 후지모토 사다요시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연습에도 열중하지 않고, 경기에서 져도 낄낄 웃으며, 밤에는 연회만 열리는 상황이었다. 특히 사와무라에 관해서는, 신뢰했던 초대 감독 미야케 다이스케가 내분으로 팀을 떠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33]。 여기서 자이언츠 재건을 위한 모린지 절의 특훈이 이루어졌다. 당초, 야수진이 맹연습하는 것을 옆에서 투수진은 한가롭게 연습 구경을 하고 있었지만, 신인 시라이시 토시오가 맹특훈을 견디며 필사적으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투수진도 마음을 고쳐먹고 연습에 매진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사와무라였고, 눈빛을 바꾸어 연습에 매달리게 되었으며, 연습 상대였던 포수 나카야마 타케시에 따르면, 특훈 마무리 무렵에는 완전히 전성기 수준까지 컨디션이 회복되었다고 한다[34]。
추계 리그에서는, 9월 25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나카야마 타케시와의 배터리로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타이거스 측에서 노히트만은 부끄럽다며 몇 번이고 말했던 나카야마는, 6회 무렵부터 카게우라 마사시나 코지마 토시오 등 타이거스 타자들에게 "이번에는 스트레이트", "이번에는 드롭"이라며 구종을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쳐내지 못했다고 한다[42]。 시즌에서는 13승(2패) 방어율 1.04(리그 2위)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2월 오사카 타이거스와의 우승 결정전에서는 3연투하며, 자이언츠에 첫 우승을 안겨주었다. 2010년대에 들어 이 경기를 기록한 2분 정도의 동영상 필름이 가나가와현에서 발견되어, NHK에 의한 화상 수정 작업을 거쳐 2015년 6월 11일 NHK 종합 "클로즈업 현대"에서 방송되었다. 사와무라의 투구 동영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 무렵, 누군가가 권총 탄환과 사와무라의 투구 속도를 비교하여 신문에 발표했기 때문에, 사와무라의 공은 권총보다 빠르다는 이야기가 나왔다[35]。
1937년 춘계 리그에서는, 5월 1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는 스피드는 물론 훌륭한 제구력으로 타이거스 타자들의 약점을 남김없이 찔러 억제했다[42]。 이 시즌은 자이언츠와 오사카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다. 자이언츠는 선두 오사카를 1.5경기 차로 뒤쫓고 있었지만, 6월 26일, 27일 마지막 직접 대결에서 사와무라는 오른쪽 눈의 부상을 무릅쓰고 2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어 선두에 올랐다[36]。 자이언츠는 그대로 근소한 차이로 도망쳐 0.5경기 차로 우승했다. 사와무라는 시즌에서 팀 승리(41승)의 절반을 넘는 24승(4패), 방어율 0.81의 성적을 기록하여 다승왕과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7완봉, 승률.857, 196탈삼진도 최고로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투수 5관왕을 달성(1980년대에 우사미 테츠야가 제창)[2]。 자이언츠의 우승에 크게 기여하여 초대 MVP(최고 殊勲選手)로 선정되었다[37]。
사와무라의 강속구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한 오사카는 감독 이시모토 슈이치가 타격 연습 시 통상적인 플레이트보다 1미터 앞에서 투수에게 던지게 하는 사와무라 대책의 맹연습을 실시했다[38]。 이 대책 때문인지, 추계 리그에서 사와무라는 오사카에 0승 4패로 두들겨 맞았고, 시즌에서도 9승(6패) 방어율 2.38(리그 6위)에 그쳤다. 같은 해 오사카와의 우승 결정전에서는, 사와무라는 1승 2패로 끝나고, 자이언츠는 2승 4패로 오사카에 우승을 빼앗겼다. 이 무렵, 오사카의 강타자였던 카게우라 마사시와는 좋은 라이벌이었고, 명승부를 펼쳐 팬들을 열광시켰다.
3. 2. 세 번의 징집과 복귀 (1938년 ~ 1943년)
사와무라는 1938년 1월 10일 징병되어 제국 육군 보병 제33연대(미에현이치시군히사이정)에 입영했다.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중국 전선에서 수류탄 투척으로 어깨를 다치고, 왼손 관통 총상과 말라리아 감염 등의 부상을 입었다.[40]1939년 8월에 귀환, 1940년 4월 9일에 제대하여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복귀 후인 7월 6일 나고야 군과의 경기에서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지만, 부상과 질병으로 구속은 떨어져 기교파 투수로 전향해야 했다.[42]
1941년 10월, 다시 소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가 1943년 1월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사이드스로로 전향했지만, 제구력 난조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52] 1943년 시즌 후, 구단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 은퇴했다.[55]
1944년 10월 2일, 세 번째로 징집되어 필리핀 방위전에 참전했다. 같은 해 12월 2일, 야쿠시마 해역 서쪽 동중국해에서 미국 해군 잠수함 시 데빌의 공격으로 수송선이 격침되어 전사했다.[58][59]
3. 3. 은퇴 (1943년)
두 번째 징병 이후에는 주무기였던 컨트롤도 잃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자이언츠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1944년을 기점으로 그를 해고했다.[1] 이미 전황이 악화되어 1944년에 일본 프로 야구의 정규 경기는 중단되었다. 기록에 남은 사와무라의 마지막 출장 기록은 투수가 아닌 대타로서의 기록이다. 본인은 이적을 희망했으나 자이언츠 구단주로부터 "사와무라는 자이언츠의 사와무라로 남아야 한다"는 설득을 받고 은퇴하게 되었다.4. 전사 (1944년)
1944년 10월 2일, 사와무라는 육군 오장으로 3번째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2일, 동중국해 앞바다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타고 있던 수송선이 침몰하면서 전사했다(향년 27세).[91]
사와무라는 1939년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를 포함하여 야구 시즌 동안에는 복무에서 해제되었다. 1942년과 1943년 시즌에 투구했지만, 단축된 1944년 시즌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1944년 12월 초, 사와무라는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하여 보르네오로 향하는 수송선 SS 하와이 마루에 탑승한 제29 보병 사단의 군인들 중 한 명이었다. 1944년 12월 2일 오전 4시, 하와이 마루는 규슈 남쪽의 섬인 야쿠시마 해역에서 USS 시 데빌(SS-400)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300명 이상의 군인과 선원이 사망했다.
거인군 퇴단 후, 가와니시 비행장에서 일하며 아내의 친가에서 살았다. 공장 월급은 적었고, 아내의 친가에서는 데릴사위와 같은 입장이어서 힘든 점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사와무라는 "아직 거인군에 적을 두고 있다"고 아내에게 계속 말해왔다고 한다.[56]
1944년 10월 2일에 두 번째 징집을 받아, 현역병 시절을 포함해 세 번째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는 타스키도 걸지 않고, 배웅도 없이, 아버지 겐지만이 동행하여 교토의 보병 제9연대에 입영했다. 사와무라는 거인군에서 해고되어 기운을 잃었고, 겐지에게 "명투수라고 부추겨져 좋은 기분만 내고 있었다, 내가 바보였어"라고 말했지만, 자신을 책망할 뿐 쇼리키나 거인군에 대한 원망은 하지 않고, 입영 시에는 웃는 얼굴을 보였다.[57]
같은 해 12월 2일 필리핀 방위전에 참전하기 위해 승선했던 군대 수송선이 야쿠시마 해역 서쪽 동중국해에서 미국 해군 잠수함 시 데빌에 의해 격침되어, 야쿠시마 해역 서쪽에서 전사했다.[58][59] 특진으로 육군 상사로 임명되었다(묘비 등에서는 특진 전의 병장 표기).
5. 사후
사와무라는 1944년 10월 2일 육군 오장으로 3번째 전쟁에 참전, 같은 해 12월 2일 동중국해 앞바다에서 타고 있던 수송선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향년 27세).[91] 프로 야구 통산 63승(52선발승) 22패, 평균자책점 1.74를 기록했다.
사와무라가 전사한 뒤인 1947년 그의 공적과 영예를 기리기 위해 여러 추모 사업이 진행되었다.
2014년 3월 10일, 사와무라의 고향인 미에현 이세시의 이세시 구라타야마 공원 야구장에서 65년 만에 한신 타이거스와의 오픈전이 열렸다. 이 경기에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비롯한 요미우리 선수 전원은 영구 결번 '14'를 착용했고, 한신은 OB이자 사와무라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필리핀 방어전에서 전사한 니시무라 유키오의 등번호 '19'를 선수 전원이 착용했다. 경기는 사와무라의 외동딸 사카이 미오의 시구식으로 시작되었다.
사와무라의 영혼은 영령의 한 사람으로서, 야스쿠니 신사 및 고향의 미에현 호국 신사에 모셔져 있다.
사와무라의 우표는 두 번 발행되었다. 1984년 일본 프로 야구 50주년[85] 기념 우표 3종 중 "투수" 우표가 사와무라이며,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86] "GIANTS" 유니폼을 입은 투수 폼으로 모델이 사와무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발행된 특수 우표 "20세기 디자인 우표" 제8집에서는 시트 여백에도 사와무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5. 1. 영구 결번과 사와무라 상
1947년 7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사와무라의 공적을 기려 등번호 '''14'''번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91] 사와무라의 퇴단부터 영구 결번 지정까지 이마이즈미 가쓰요시와 사카모토 시게루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등번호 14번을 사용했다. 같은 해, 사와무라의 공적과 영예를 기리기 위해 '사와무라 에이지 상'(''''사와무라 상''''')이 제정되어 프로 야구 그 해의 최우수 투수에게 수여하게 되었다.[3]1959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66년 6월 25일, 제27회 전몰자 서훈으로 훈7등청색 동엽장을 추증받았다.[60]
도쿄 돔 근처의 '진혼의 비'에는 이시마루 신이치 등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프로 야구 선수와 함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향과 가까운 이세시 이와부치초 이치요보 묘지에 사와무라의 묘가 건립되어 있으며, 묘석은 공 모양을 본뜬 형태로 앞면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G', 뒷면에는 사와무라의 등번호 '14'가 새겨져 있다. 2017년에는 친척의 사정으로 사와무라의 묘가 '묘지마이'가 되었고,[61] 현재는 기념비로 묘지에 남아 있다.
2017년 2월 1일, 사와무라는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세시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 탄생 100주년 기념 사업'[62]을 추진, 3월 20일 - 3월 26일에는 '사와무라 에이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고, 3월 22일에는 구라타야마 야구장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닛폰햄의 오픈전이 개최되었다. 이 경기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을 비롯한 선수 전원이 영구 결번 '14'를 착용했다.
5. 2.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47년 7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사와무라의 공적을 기려 등번호 '''14'''번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91] 같은 해에 사와무라의 공적과 영예를 기리기 위해 사와무라 에이지상(통칭 '''사와무라상''')이 제정되어 프로 야구 그 해의 최우수 투수에게 수여하게 되었다.1959년에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60] 1966년 6월 25일에는 제27회 전몰자 서훈에 의해 훈7등 청색 동엽장을 추서받았다.
5. 3. 기타
1944년 10월 2일 육군 오장으로 3번째 전쟁에 참전, 같은 해 12월 2일 타고 있던 수송선이 동중국해 앞바다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향년 27세).[91] 사와무라가 전사한 뒤인 1947년 7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사와무라의 등번호 14번을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같은 해에 사와무라의 공적과 영예를 기리기 위해 사와무라 에이지상(沢村栄治賞일본어, 통칭 '''사와무라상'''(沢村賞일본어))이 제정되었다. 1959년에는 야구 전당(일본 프로 야구의 명예의 전당에 해당함)에 들어갔고, 1966년 6월 25일에는 제27회 전몰자 서훈에 의해 훈7등 청색 동엽장이 추서되었다.[60]도쿄 돔 옆에 세워진 ‘진혼의 비석’에는 이시마루 신이치 등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던 프로 야구 선수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고향과 가까운 이세시 이와부치 정 묘지에 있는 사와무라의 무덤이 건립되면서 그 묘석에는 공을 본뜬 형태로 전면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G’, 후면에는 사와무라의 등번호인 ‘14’가 새겨져 있다. 2017년에는 사와무라의 묘가 친척의 사정으로 인해 '묘지마이'가 행해졌고,[61] 현재는 기념비로 묘지에 남아 있다.
2014년 3월 10일, 사와무라의 고향인 미에현 이세시의 이세시 구라타야마 공원 야구장에서 65년 만에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오픈전에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비롯한 선수 전원이 영구 결번 '14'를 착용했다. 한신은 OB로 사와무라와 같은 고향 출신이자 필리핀 방어전에서 전사한 니시무라 유키오의 등번호 '19'를 선수 전원이 착용하고, 사와무라의 외동딸 사카이 미오의 시구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2017년 2월 1일, 사와무라 에이지는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세시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 탄생 100주년 기념 사업'[62]을 내걸고, 3월 20일 - 3월 26일에는 '사와무라 에이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렸다. 3월 22일에는 다시 구라타야마 야구장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 닛폰햄의 오픈전이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을 비롯한 선수 전원이 영구 결번 '14'를 착용했다.
사와무라의 영혼은 영령의 한 사람으로서, 야스쿠니 신사 및 고향의 미에현 호국 신사에 모셔져 있다.
현재까지 사와무라의 우표가 2번 발행되었다. 먼저 1984년 일본 프로 야구 50주년[85] 기념 우표 3종 중 "투수"라는 제목의 우표가 사와무라이다. 공식적으로는 사와무라라고 발표되지 않았지만,[86] "GIANTS" 유니폼을 입은 독특한 폼의 투수이므로 모델이 사와무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에 발행된 특수 우표 "20세기 디자인 우표" 제8집에서는 사와무라의 우표뿐만 아니라 시트의 여백에도 사와무라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다.
6. 투구 스타일 및 평가
일본 프로 야구 여명기에 전설적인 활약을 보인 '불멸의 대투수'로 불리는 사와무라 에이지는 타고난 강속구로 유명했다. 1934년 미일 야구에서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압도했으며, "스쿨보이 사와무라"라는 별명으로 미국에서도 이름을 알렸다.[2]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 최고의 강속구 투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와무라를 꼽는다. 사와무라와 동시대에 선수로 활약했던 카리타 히사노리는 벳쇼 타케히코와의 대담에서 그의 구속이 140km 초반에서 145km 정도였을 것이라고 언급했다.[64]
사와무라의 직구는 타자의 무릎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위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의 공을 직접 상대했던 마츠키 겐지로는 "떠오르기 때문에 배트에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70]
치바 시게루와 아오타 노보루는 피칭 머신을 통해 사와무라의 공을 재현하는 실험을 했다. 치바가 "이 정도였다"라고 느꼈을 때 머신의 속도는 165km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사와무라와 경기했기 때문에, 마키하라 히로미는 이들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71]
1999년 방송된 '용자의 스타디움・프로야구 명장면'에서는 주쿄 대학 유아사 가게모토 교수의 도움으로 사와무라의 구속을 159.4km로 재현했다. 이는 캐치볼 영상만을 바탕으로 한 추정치였다.[72] 유아사 교수는 다른 매체에서도 사와무라의 구속을 160.4km로 추정하기도 했다.[73]
2015년 6월 11일 방송된 '클로즈업 현대'에서는 사와무라의 실제 경기 영상이 발견되어, 다리를 거의 들지 않는 투구 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5] 유아사 교수는 이 영상을 바탕으로 사와무라의 구속을 150km대 후반(계산상 159km)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유아사 교수의 160km에 가까운 구속 추정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발표된 것이며, 학회 발표나 논문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다.
6. 1. 투구 폼
사와무라 에이지는 신발 밑창의 스파이크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다리를 높이 차올리는 독특한 투구 폼으로 유명했다. 이 폼은 1935년 제1차 미국 원정 당시 감독이었던 미야케 다이스케의 지도로 만들어졌다. 물리학의 지렛대 작용을 응용한 합리적인 투구 방법으로, 공을 쥔 오른팔을 뒤로 힘껏 당기는 백스윙과 동시에 왼발을 힘껏 높이 들어 올려 그 반동을 최대한 활용하여 날카롭게 공을 던졌다. 미야케에 따르면 사와무라의 이전 투구 폼이 이러한 방식에 적합했기 때문에 채택했다고 하며[76], 칼 허벨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사와무라의 특징적인 투구 폼은 벳쇼 아키라 등 후대의 투수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동료였던 마에카와 하치로에 따르면 사와무라는 이 폼을 가끔 사용했다고 한다.
사와무라는 직구와 드롭, 내추럴 슈트[77]를 던졌다. 전성기에는 직구와 드롭만으로 타자를 압도했는데, 직구는 속도뿐만 아니라 회전수가 많아 타자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느낌 때문에 "2단 팝"이라고 불렸다[78]。 드롭은 공이 한 번 튀어 오른 후 급격하게 떨어지는 낙차가 큰 공으로, "현하(懸河)의 드롭"으로 형용되었다. 타니구치 고로에게서 비틀어 던지는 요령을 배워 드롭의 위력을 더했다고 한다[79]。 병역으로 인한 부상으로 속구가 쇠퇴한 후에는 새롭게 익힌 슈트를 주로 던지며[43], 제구력을 살려 꼼꼼하게 코너를 찌르는 기교파 투수로 전향했다[63]。
사와무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장 공이 빨랐을 때는 포수 미트에서 한참 앞의 땅인 홈 베이스 판 앞 가장자리를 목표로 공을 던졌다고 한다. (거기에서 공이 솟아올라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간다). 전후의 속구 투수 중 오자키 유키오는 포수 미트가 아닌 약간 아래의 무릎을 향해 던졌고, 호리우치 츠네오는 공이 오른손에서 한 가닥 실을 곧게 당긴 것처럼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갔다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80]。
6. 2. 구종 및 구속
사와무라 에이지는 전성기에 직구와 드롭만으로 타자를 압도했다. 직구는 속도뿐만 아니라 회전수가 많아 타자 눈앞에서 솟아오르는 느낌 때문에 "2단 팝"이라고 불렸다.[78] 드롭은 낙차가 심해 "현하(懸河)"의 드롭으로 형용되었다.[79] 1935년 미야케 다이스케의 지도로, 물리학의 지렛대 작용을 응용한, 다리를 높이 차올리는 독특한 투구 폼을 익혔다.[76]병역으로 인한 부상으로 속구가 쇠퇴한 후에는 내추럴 슈트를 주무기로,[43] 제구력을 살려 꼼꼼하게 코너를 찌르는 기교파로 전향했다.[63]
사와무라의 구속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자료 출처 | 구속 (추정치) | 비고 |
---|---|---|
1937년 잡지[74] | 시속 133km | 과학적 계측치 (정밀도 불명) |
1999년 프로그램[72][73] | 시속 159.4km ~ 160.4km | 캐치볼 영상 기반 추정 |
2015년 경기 영상 분석[75] | 시속 150km대 후반 | |
치바 시게루, 아오타 노보루 증언[71] | 시속 165km | 피칭 머신 상대 실험, 전성기 이후 기준 |
6. 3. 다른 선수들의 평가
일본 프로 야구 여명기에 전설적인 활약을 보인 '불멸의 대투수'로 불리는 사와무라 에이지는 타고난 강속구로 유명했다. 1934년 미일 야구에서는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압도했으며, "스쿨보이 사와무라"라는 별명으로 미국에서도 이름을 알렸다.[2]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 최고의 강속구 투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와무라를 꼽는다. 사와무라와 동시대에 선수로 활약했던 카리타 히사노리는 벳쇼 타케히코와의 대담에서 그의 구속이 140km 초반에서 145km 정도였을 것이라고 언급했다.[64]
사와무라의 직구는 타자의 무릎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위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의 공을 직접 상대했던 마츠키 겐지로는 "떠오르기 때문에 배트에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70]
치바 시게루와 아오타 노보루는 피칭 머신을 통해 사와무라의 공을 재현하는 실험을 했다. 치바가 "이 정도였다"라고 느꼈을 때 머신의 속도는 165km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사와무라와 경기했기 때문에, 마키하라 히로미는 이들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71]
1999년 방송된 '용자의 스타디움・프로야구 명장면'에서는 주쿄 대학 유아사 가게모토 교수의 도움으로 사와무라의 구속을 159.4km로 재현했다. 이는 캐치볼 영상만을 바탕으로 한 추정치였다.[72] 유아사 교수는 다른 매체에서도 사와무라의 구속을 160.4km로 추정하기도 했다.[73]
2015년 6월 11일 방송된 '클로즈업 현대'에서는 사와무라의 실제 경기 영상이 발견되어, 다리를 거의 들지 않는 투구 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75] 유아사 교수는 이 영상을 바탕으로 사와무라의 구속을 150km대 후반(계산상 159km)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유아사 교수의 160km에 가까운 구속 추정은 언론 매체를 통해 발표된 것이며, 학회 발표나 논문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다.
7. 개인적인 삶
사와무라 에이지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프로 야구 선수로 번 돈의 대부분을 가족에게 보냈다.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징병을 피할 수 없었고, 세 번이나 소집되어 결국 전사했다.[23]
1935년 2월부터 7월까지 제1차 미국 원정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24] 조 디마지오와 대결하기도 했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스카우트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기도 했다.[28]
1936년 프로 야구 리그가 시작된 후, 모린지 절 특훈을 통해 연습에 매진하여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42] 1937년에는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MVP(최고 殊勲選手)로 선정되었다.[37]
1938년 징병으로 제국 육군에 입영하여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40] 이 과정에서 수류탄 투척으로 오른 어깨를 다치고, 왼손에 관통상을 입었으며, 말라리아에도 감염되었다. 1940년 제대 후 자이언츠에 복귀했지만, 부상과 질병으로 이전과 같은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고 기교파 투수로 전향했다.
1941년 5월, 오사카 무역상의 딸 마이이 료코와 결혼했다.[48] 같은 해 10월 다시 소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51] 1943년 자이언츠에 복귀했지만, 부상으로 사이드스로로 전향해야 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1944년 자이언츠에서 해고 통보를 받고 은퇴했다.[55] 이후 제작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다가, 같은 해 10월 세 번째 징집을 받았다.[57] 1944년 12월 2일 필리핀 방위전에 참전하기 위해 승선했던 군대 수송선이 미국 해군잠수함 "시 데빌"에 의해 격침되어 전사했다.[59]
사와무라는 "나는, 곧게(똑바로) 던지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으며,[81]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딸이 태어났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 술과 마작은 하지 않았고, 장기가 취미였다.[82] 미국 원정 당시 인기 여배우 다나카 키누요의 이름을 대신 써주거나, 술 취한 사람에게 "바보 자식"이라고 써주는 등 유머 감각도 있었다.[83]
8.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사구 | 몸맞는 볼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36년 하계 | 도쿄 교진군 | 4 | 2 | 1 | 0 | 0 | 1 | 1 | - | - | .500 | 73 | 17.0 | 16 | 1 | 5 | - | 0 | 11 | 0 | 0 | 12 | 4 | 2.12 | 1.24 |
1936년 추계 | 15 | 10 | 10 | 3 | 0 | 13 | 2 | - | - | .867 | 483 | 120.1 | 63 | 0 | 58 | - | 2 | 112 | 0 | 1 | 24 | 14 | 1.05 | 1.01 | |
1937년 춘계 | 30 | 24 | 24 | 7 | 2 | 24 | 4 | - | - | .857 | 938 | 244.0 | 138 | 2 | 68 | - | 2 | 196 | 0 | 0 | 47 | 22 | 0.81 | 0.84 | |
1937년 추계 | 20 | 17 | 12 | 3 | 1 | 9 | 6 | - | - | .600 | 575 | 140.0 | 99 | 1 | 53 | - | 1 | 129 | 3 | 0 | 50 | 37 | 2.38 | 1.09 | |
1940년 | 12 | 12 | 7 | 1 | 0 | 7 | 1 | - | - | .875 | 325 | 79.1 | 44 | 1 | 47 | - | 1 | 31 | 0 | 0 | 26 | 23 | 2.59 | 1.15 | |
1941년 | 20 | 18 | 11 | 6 | 2 | 9 | 5 | - | - | .643 | 606 | 153.2 | 108 | 3 | 58 | - | 2 | 73 | 2 | 0 | 37 | 35 | 2.05 | 1.08 | |
1943년 | 4 | 3 | 0 | 0 | 0 | 0 | 3 | - | - | .000 | 63 | 11.0 | 17 | 0 | 12 | - | 0 | 2 | 0 | 0 | 17 | 13 | 10.64 | 2.64 | |
통산 : 5년 | 105 | 86 | 65 | 20 | 5 | 63 | 22 | - | - | .741 | 3063 | 765.1 | 485 | 8 | 301 | - | 8 | 554 | 5 | 1 | 213 | 148 | 1.74 | 1.03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9.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다승왕: 2회 (1936년 추계, 1937년 춘계)[2]
- 최다 선발승: 2회 (1936년 추계(8선발승), 1937년 춘계(20선발승))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1937년 춘계)[2]
- 최고 승률: 1회 (1937년 춘계)[2]
- 최다 탈삼진: 2회 (1937년 춘계, 1937년 추계) ※당시는 타이틀이 아님.[2]
- MVP: 1회 (1937년 춘계)[2]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59년) ※특별 헌액
- 노히트 노런: 3회 ※NPB 타이기록. 다른 선수로는 소토키바 요시로가 기록[2]
10. 등번호
- '''14''' (1934년 ~ 1937년, 1940년 ~ 1941년, 194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3]
- '''17''' (1935년)
1947년 7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사와무라의 공적을 기려 등번호 '''14'''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사와무라의 퇴단부터 영구 결번 지정까지 이마이즈미 가쓰요시와 사카모토 시게루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등번호 14를 사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YOMIURI SHIMBUN
https://info.yomiuri[...]
2024-04-24
[2]
서적
プロ野球データブック'84
講談社文庫
1984
[3]
뉴스
ジョンソン“無冠”でも沢村賞 バッキー以来52年ぶり助っ人受賞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16-10-25
[4]
서적
ジャイアンツ栄光の70年
[5]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6]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7]
뉴스
大阪朝日新聞京都版
1920-08-01
[8]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9]
뉴스
(白球の世紀:43)至宝、彼の名は沢村栄治 高校野球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18-03-09
[10]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11]
기타
先人たちの底力 知恵泉・選「野球が愛されるわけ 沢村栄治の挑戦」
http://www2.nhk.or.j[...]
NHK
2017-07-29
[12]
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
[13]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14]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15]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16]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17]
뉴스
読売新聞
1934-11-21
[18]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19]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0]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1]
웹사이트
https://www.jiji.com[...]
[22]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3]
간행물
日本プロ野球偉人伝 vol.1(1934→1940)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4]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5]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6]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7]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28]
간행물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29]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30]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31]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32]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33]
뉴스
【沢村栄治 栄光の伝説(10)】ふてくされた巨人・沢村栄治、茂林寺で変わる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17-06-27
[34]
간행물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35]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36]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37]
웹사이트
沢村栄治の初代MVBPの表彰状
http://www.baseball-[...]
2019-06-23
[38]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39]
서적
太田
2021
[40]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41]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42]
서적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43]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44]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45]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46]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47]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48]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49]
서적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50]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51]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52]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53]
서적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54]
서적
ジャイアンツ栄光の70年
[55]
간행물
さらば!南海ホークス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8
[56]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
[57]
서적
巨怪伝 正力松太郎と影武者たちの一世紀 上巻
文春文庫
2000
[58]
PDF
太平洋戦争時の喪失船舶明細表(汽船主体)
http://www.op316.com[...]
[59]
문서
日本商船隊戦時遭難史
海上労働協会
[60]
관보
官報
[61]
뉴스
沢村栄治さん親族が法要 背番号14石碑残し『毎日新聞』2017年12月13日付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12-13
[62]
웹사이트
沢村栄治生誕100周年記念事業
http://www.city.ise.[...]
伊勢市
[63]
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
[64]
간행물
プロ野球 豪球魔球100人 ホームラン 2月号
日本スポーツ出版社
1989
[65]
웹사이트
【日本ハム】有原「7,8割」で捕手“破壊”
https://web.archive.[...]
[66]
웹사이트
山口千万石氏死去 故沢村投手の相手捕手
http://www.47news.jp[...]
[67]
웹사이트
私の甲子園(1)沢村栄治の一人娘
http://www.asahi.com[...]
[68]
웹사이트
山口千万石氏(故沢村栄治投手とバッテリーを組んだ捕手)老衰のため死去
https://www.nikkansp[...]
[69]
웹사이트
沢村栄治(1917~1944)
https://web.archive.[...]
[70]
방송
Sports Graphic Number 125号、NHKおしゃべり人物伝「沢村栄治」1984年10月19日放送
1984-10-19
[71]
Youtube
https://www.youtube.[...]
[72]
웹사이트
https://www.nikkei.c[...]
[73]
웹사이트
https://www.nikkei.c[...]
[74]
서적
東京ジャイアンツ北米大陸遠征記
東方出版
2007-03
[75]
웹사이트
幻の“日本シリーズ” ~フィルムからよみがえる選手たち~
https://www.nhk.or.j[...]
日本放送協会
2015-06-11
[76]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77]
서적
日本プロ野球偉人伝 1934~1940
[78]
서적
巨人軍の男たち
[79]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80]
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
[81]
서적
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
[82]
서적
巨人軍の男たち
[83]
서적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
[84]
서적
不滅の大投手 沢村栄治
[85]
문서
[86]
서적
[87]
문서
[88]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89]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
[90]
뉴스
【沢村栄治 栄光の伝説(8)】巨人軍結成、第一次アメリカ遠征
https://column.sp.ba[...]
슈칸 베이스볼
2024-04-18
[91]
뉴스
【背番号物語】「#14」伝説から始まった栄光の投手ナンバー
https://column.sp.ba[...]
슈칸 베이스볼
2024-01-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